약자는 누구인가. 한동대에 들어오고 나서 꾸준히 고민하는 주제다. 약자가 자꾸 눈에 밟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세입자는 집주인에게 상대적인 약자가 된다. 직원은 사장 앞에서 상하관계로부터 기인한 압박을 경험한다. 국장은 마감을 늦춰달라는 기자들 앞에서 한없는 무력감을 느낀다. 중간에 헛소리가 끼어 있지만, 요지는 약자가 시∙공간에 관계없이 늘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번 239호 한동신문은 많은 약자를 정의했다. 여자, 장애인, 청소노동자와 단기간 아르바이트생까지. 약자를 정의하는 것은 굉장히 예민한 문제다. 섣부르게 약자 편을 들었다가는 자칫 역차별 논란으로 이어지기에 십상이다. 그럼에도 감히 한동대의 약자를 정의한다. 약자를 인식해야 약자가 당하는 폭력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불편한 단어를 던졌다. 혹자는 발끈할지도 모른다. 일반 사회에서라면 몰라도, 한동대에서 누가 감히 약자를 핍박한다는 말인가. 생활관 입주일이면 많은 남자가 각자 아는 여자의 짐을 들어주려 분주하다. 장애인이 보인다면 뭐라도 하나 도와주려고 하지, 주먹을 휘두르지는 않는다. ‘그런’ 폭력은 없다.
이제 말하려 하는 폭력은 ‘다른’ 폭력이다. 한동대에서 여자, 장애인, 청소노동자와 단기간 아르바이트생을 향해 이뤄지는 폭력 말이다. 이런 상황을 가정해보자. 나는 여성스러운 여자를 좋아한다. 내 옆의 여자에게 여성스러워지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다. 여성스럽지 않다고 헐뜯고 공격할 생각은 더더욱 없다. 그냥 여성스러운 여자가 좋다고 말할 뿐이다. 내 취향을 말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던가.
작은 선입견이 모여 ‘틀’의 폭력을 만든다. ‘이런 남자가 멋있다’는 칭찬의 말은 곧잘 ‘그렇지 않으면 안 멋있다’는 폭력적 사고로 변모한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크루스테스는 행인을 납치해다 침대에 눕히고, 침대 길이에 맞게 자르거나 늘려 살해하는 인물이다. 현실도 신화와 다르지 않다. 남자나 여자, 누구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눕혀져 사회의 입맛에 맞게 재단 당한다. 이상하다. 그렇다면 남성과 여성 모두 약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왜 여성만 약자로 정의한단 말인가. 애초에 이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남성성은 일반적으로 강함과 이어진다. 멋진 근육, 박력, 카리스마 등 전통적인 남성성은 강자의 속성에 가깝다. 여성성은 반대다. 얌전함, 발랄함, 청순함 등은 전형적인 약자의 특성이다. 수백 년의 유교 시대를 거치며 굳어진 선입견이다. 섬세한 남자가 뜬다고, 털털한 여자가 유행이라고 순식간에 뒤바뀔 일이 아니라는 거다.
그래서 여성주의는 갑옷의 재분배다. 남자는 갑옷을 벗어 던져야 한다. 남자는 돈을 더 많이 내야 하고, 리더를 맡아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여자에게는 갑옷이 좀 더 필요하다. 관리 안 하는 여자는 여자가 아니라는, 얌전해야 한다는 말에 저항하길 바란다. 약자인 여자를 위하는 일은 남자와 여자 모두를 위한 일이다.
언급한 것은 ‘다른’ 폭력의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고용 불안정도, 앞이 안 보이는 이들의 ‘눈’을 가로막는 장애물도 모두 누군가에겐 폭력이다. 그 폭력을 내가 다 해결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공감에서 시작하자고 답하겠다. 공감을 통해 내 권리를 양보할 용기를 얻고, 그 용기로 약자들을 위해 목소리 내면 된다. 허황된 꿈일까. 맞다. 그래도 모두가 함께 허황된 꿈을 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작권자 © 한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