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학회 뉴웨이브(NEWAVE)

콘텐츠융합디자인 15 아트디렉터 윤세혁

 

우리말에 아름답다 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의 견해가 있다. 그중 하나는 ‘알음’ 과 ‘답다’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보는 관점이다. ‘알음’과 ‘답다’가 합쳐져 아름답다라는 단어가 되는 것이다. 이는 잘 아는 것이 곧 미의식, 아름다움의 시작이라는 의미로 이어진다. 꽃이 꽃임을 잘 알고 스스로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내어 보이는 것, 그것을 아름답다고 하고 그렇지 못한 반대의 경우 추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견해는 각각의 사물들이 각자의 미덕을 알아 그 탁월함을 이르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했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일맥상통한다.

또 다른 견해는 15세기 문헌에서 처음 ‘아답다’ 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여기서 ‘아’는 여러 문맥적인 정황상 ‘나’를 뜻한다. 즉 ‘나답다’를 ‘아름답다’의 어원으로 보는 견해이다. 뉴웨이브는 이 아름답다 라는 말의 어원을 모티브로 가져와서 ‘나름다움’이라는 단어를 만들어서 그것을 모토로 삼고 있다. 아름답다의 어원대로, 나 다운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뜻이다.

아름다움의 어원에서 보았듯이, 아름다움은 나 다움이고, 나 답기 위해서는 나를 잘 알아야 한다. 나를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봤더니 기억나는 이야기가 있었다. 아는 형이 눈이 나빠서 안경을 쓰지 않으면 항상 찌푸린 표정이어서 인상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형 안경 쓰는 게 좋은 것 같다고 말했더니 형이 ‘나는 안경을 안 쓴 내 모습이 더 좋다’고 했다. ‘안경을 안 쓴 내 모습이 좋아’ 라는 말은 내게 충격적으로 들려왔다. 나는 안경을 쓰진 않지만 사람들한테 안경을 쓴 나의 모습이 좋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면 나는 안경을 쓰게 될 것 같다. 이처럼 대부분의 경우 다른 사람들의 말에 휘둘려 정작 내가 무엇을 좋아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지 못하고 결정할 때가 많다. 특히 옷차림에 경우에 내가 좋아하는 옷을 선택해서 입기보다는 남들이 좋아할 것 같은 모습으로 입게 된다. 더 나아가 단지 옷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선택에서 내가 좋아하는 선택보다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선택을 하는 쪽으로 영향을 받는다.

요즘 신조어 중에 ‘꾸안꾸’라는 단어가 있다. ‘꾸민 듯 안 꾸민 듯 꾸민’ 이라는 말인데 마치 21세기 패션의 정석, 완성으로 일컬어지는 단어이다. 꾸민 것도 아니고 안 꾸민 것도 아니어야 한다는 뜻이 상당히 모순적인 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신조어에 고개를 끄덕인다. 너무 튀어서 사람들에게 거슬리면 안 되고 또, 너무 안 꾸민 것처럼 추레하거나 신경 안 쓴 듯한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된다.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사람들에게 거슬리지 않게 꾸민 듯 안 꾸민 듯 꾸며서 입으면, 센스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대중의 잣대가 엄격한 상황속에서 살다가 ‘안경 안 쓴 내 모습이 더 좋아서 안경을 쓰지 않다’는 선언은 나에게 당연히 충격이었다. 아무리 봐도 형은 안경 쓴 모습이 나아 보였다. 그럼에도 자기가 싫다는 것이 유일한 이유인 형에게 나는 아무런 말도 더 할 수 없었다. 그 이후로 내가 생각한 나 다운 모습은 이런 모습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을 잘 알고, 그렇게 사는 것, 혹은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우리는 외적으로 꾸미는 것을 그 사람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다. 오히려 내면의 아름다움을 더 가치 있게 여기거나, 삐딱한 경우 속이 허하기 때문에 치장으로 가린다는 식으로 그 사람 자체를 격하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입고 싶은 옷을 입고 거리로 나가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정말 입고 싶은 옷은 남들이 볼 때 과할 수도, 너무 가벼울 수도, 너무 더워 보일 수도, 너무 색이 강할 수도, 인상이 나빠 보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로 나가 내가 좋아하는 나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단지 껍데기를 꾸미는 것을 넘어 자기 내면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했을 경우 다른 사람들이 안 좋게 볼 수 있다. ‘꾸안꾸’의 기준에서 벗어나거나, 심한 경우 ‘꾸몄음에도 별로인’ 이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 이 옷을 입기로 결정했다면, 화려하게 꾸민 나도 나이고, 추리하게 보이는 나도 나이고, ‘쟤는 옷을 왜 저렇게 입을까?’의 쟤도 나이고 ‘오빠는 그 옷 밖에 없어요?’의 오빠도 나다. 누가 뭐라하건,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으로 사람들 속에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그게 자유고 행복이고 나다움이고 아름다움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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